바람과 구름의 만남 정조와 정약용 일화존잼!!! 5가지

정조는 22대 국왕이자 조선시대 개국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겼다해서 사후 영조와 함께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입니다. 정조는 역도라는 명분으로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세손시절부터  정적들에게서 위협을 많이 받았기에 사도세자를 역도로 몰아간 노론세력들 사이에서  책을 읽고 무술을 안마하고 의학서적까지 통달하였습니다.

그러한 정조가 유일하게 챙긴 사람이 정약용이라 하는데 이 글에서 바람인 정조 구름인 정약용에 관한 정조와 정약용 일화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조와 정약용

 

정조 어진
정조 어진으로 상상어진이라하며 1989년 이길범작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말이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두 사람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에게 이로운 비를 내리는 것이니,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아닌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 탄생 250주년 다시 보는 다산 2012.05.29년 자료 참조>

정약용은 조선후기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때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정조가 1783년 세자 책봉 기념 증광감시에 합격한 정약용을 기억했고, 1789년 남인이라는 이유로 계속 떨어지자 정조가 특별 과거를 열어 대과에 급제하게 함으로 조선 근대 공학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하는 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 일화

정약용 영정
정약용 초상화

 

1. 성균관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시절 정조는 유생들에게 숙제 내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중용을 읽고 의문점 70개를 뽑아 논문을 쓰라고 하니, 정약용이 구구절절 쓴 글이 정조의 맘에 들었고 그로 인해 정약용을 더욱 어여삐했으며,  정약용은 크고 작은 성균관 시험에서 거의 1등을 해서 정조에게 책을 선물로 많이 받고 흰 종이 100필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조가 이 종이를 껴안고 궁궐문까지 걸어가라고 시키키도 했는데 이유는 정약용의 지혜를 사람들에 널리 알리려고 한 것이라 합니다.

또한 정조는 정약용 시험지를 직접 채점하며 시험지에 칭찬 문구도 써주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를 지으라고도 한 후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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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강 배다리, 수원 화성

대과 급제후 6개월만에 한강을 건널 배다리를 만들라고 했는데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으로 이장하는데 쓸 배다리인걸 정약용이 알고 일사천리로 처리했으며,  정약용은 정조가 주는 벼슬이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 한다고 고향으로 낙향하기도 했습니다.  정조가 이에 정약용에게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주민들이 이주할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성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으로 수원 화성을 만들기도 했다 합니다.




3. 활쏘기

정약용은 책만 좋아하는 선비였으나 정조에게 병법서를 선물로 받았는데 정약용이 어이 없어했다고도 할 정도로 정약용은 몸치였다 합니다.

또한 정조는 조선 선비들에게 활쏘기는 기본 소양이라하여 대다수 선비들은 활을 어느정도 쐈는데, 유독 체제공과 정약용이 못해 정조가 하도 뭐라하니 활쏘기에 매진하였다 합니다.

열심히 하니 체제공은 점점 실력이 늘었으나 정약용은 열심히 해도 여전히 못해 정조의 놀림을 받았으며, 채제공 일기에는 활 못쏜다고 갈굼을 받았으나 오늘은 10발중 8발을 맞춤으로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반면 정약용은 선비란 자고로 학문에 정진을 해야 하는 법 궁술보다는 독서에 시간을 쏟는 것이 이롭다라고 적혀 있어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하네요.  나중에 정약용은 무과 시험관으로 감독까지 했으며 임시 병조참의직도 맡았다 합니다.

또한 정약용은 활쏘기 시험에 맞추지 못해 벌을 계속 받았는데,  그 중 궁궐안 부용지라는 연못 가운데의 인공섬에 배를 타고 노저어 유배도 갔다고 합니다. 정조 대왕은 정약용 놀리기에 진심이었던 듯 합니다.

 

영조 탕평책 탕평채 청포묵 이야기

4. 정조의 선물

성균관은 기숙사제인데, 정조가 야밤에 정약용을 불러 1:1 독대로 시문과 이야기를 나눴으며 내기를 해서 정약용에게 진귀한 책, 김홍도가 만들어 준 연꽃 부채, 정조가 직접 사용한 책갈피, 봄에는 봄이 춥다라며 비단도포를 선물하기도 했다 전해집니다.

 

5. 술덕후 정조와 술자리

경복궁
경복궁 Pixabay로부터 입수된 SH Cho님의 이미지 입니다.

 

술덕후 정조는 술이 약한 정약용 필통에 술을 한가득 부어  주량대로 다 마셔라고 재촉을 내릴 정도로 술을 즐겼으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중 ‘정조께서 소주를 가득 따라 하사하셔서 난 오늘 죽었다’라고 생각했다는 구절도 있을 정도로 정약용과의 술자리를 즐겼다 합니다. 정약용은 술에 취해 집에 가며 담벼락에 얼굴을 긁히곤 했다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합니다.

 

열살터울이었던 정조와 정약용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학문을 나누는 벗이었으며 당파와는 별개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신화로 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동지였습니다.

정조에게 정약용은 조선을 변화시키기에 필요했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인재를 육성, 외세에 침탈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국왕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동반자였습니다.

정조가 48세의 나이가 아닌 단 10년만이라도 더 통치하고 붕어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좀 더 달라졌을까요? 라는 물음이 던져집니다.

참 그거 아시나요? 배우 정해인이 다산 정약용의 직계6대손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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